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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
ARCHI TALK 13.04.30

“내가 이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이 길의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의미 깊은 일인 것이다.
만약 세대 간 단절이 더 중요하다면 땅의 역사를 각별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 길을 의미 깊은 그림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떤 길목에서 할아버지가 보던 풍경을 똑같이 아버지가 바라보았고, 나 또한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대한 사건이자 역사다. 동일한 풍경을 동일한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길은 풍경을 기록하고 보존한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홈 파인 레코드판이 소리를 저장하듯 말이다. 그래서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Figurative Journal)라고 부르는 것이다.” – 정기용, <감응의 건축> 중에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전은 건축가 정기용(1945 – 2011)이 미술관에 기증한 기록물을 중심으로 건축과 도시, 삶과 문학에 대한 의미를 재발견해보는 전시라는 의미에서 특별했습니다.
전시를 보면서 새삼 놀란것은,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이었습니다. 그속에서 한 시대를 살았던 건축가로서 그곳에 내재된 장소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는지가 묻어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건축가의 흔적은 역사속에 많은 것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건축가라면 지금 보고, 읽고, 표현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그림일기’ 속 풍경이 될 수 있다는걸…. 알랑가몰라~

# 1 성장의 공간

정기용이 설계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는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친근함과 진솔함이 가장 많이 묻어난다. 그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건축 언어로 작업하여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러한 건축물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정기용 특유의 상상력과 사용자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드로잉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에게 학교와 같은 공공건축은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고 회상할 가치가 있는 기억의 보고”이다. 아이들이 장소와 교감하면서 만들어지는 아늑하고 풍요로운 감정이야 말로, 학교나 도서관과 같은 성장의 공간을 통해 정기용이 전하고자 했던 아름다운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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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거주의 의미

많은 집들이 거주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균질한 공간으로, 단지 집이 지닌 부동산 가치에만 집중하고 있는 오늘날, 정기용의 주택은 집이라는 공간에 담긴 ‘거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거주한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내가 머무르는 장소에다 내 삶의 과정을 새기는 일이다. 우리가 집에서 거주할 수 있을 때, ‘집은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관계의 시작’이 되고 삶은 역사가 된다. 따라서 거주를 위한 집이란 개인의 내밀한 사적 공간과 도시의 공적 공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형태의 공간이다. 삶의 기억이 오롯이 저장된 추억의 공간, 그래서 회상할 가치가 있는 공간은 개인의 장소이자 집단의 장소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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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도시와 건축

정기용은 우리 도시에 대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발언한 건축가였다.
문화연대, 서울건축학교 등에서 각종 활동을 하면서 도시를 보고, 읽고, 표현한 그는 도시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 속에 세워진 한 건물 안에는 도시 전체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도시의 건축은 장소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도시의 문맥 사이에 들어서는 건축은 어떤 문장에 삽입되는 단어처럼 도시 풍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어느 작업보다 건물의 표정과 연속성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정기용의 도시 건축은 아양성의 보고인 도시에서 같지만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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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건축의 뿌리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정기용은 1972년 파리에 유학하여 1986년 귀국하기까지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을 차례로 공부하며 실무의 기틀을 쌓았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정기용은 자신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문화와 글을 많이 접했다. 특히 추고, 아날트 콥, 앙리 르페브르 등 프랑스 68혁명을 이끈 신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고착화된 기존 제도를 거부하고, 근대가 남긴 부조리한 유산에 반기를 들었다. 이렇듯 유학시절에 접한 풍부한 문화 담론들은 건축에서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땅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가는 흙건축에서 영감을 얻었고, 프랑스 신도시 건설에 대한 비판적 논의 등을 전개하며 자본이 외면한 미비하고 무가치한 것들에서 건축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유학하는 동안 쌓은 정신적 사상의 토대 위에서 정기용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사회 현실과 구조로 시선을 옮기며 우리 땅의 문제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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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실 B양 | BAUM ARCHITECTS
B양은 BAUM ARCHITECTS 홍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범건축 사람들 이야기와, 공개되지 않았던 프로젝트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